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고여 피살 사건 (문단 편집) === 용의국가 2: [[금나라]](우가하) === 반면, 고려는 자국에 쏟아진 혐의를 부인했고 이 사건의 범인은 금나라의 [[잔당]]인 [[우가하]](于加下)라고 주장했다. 고종이 당시 몽골 제국의 칸이었던 [[오고타이 칸]]에게 보낸 국서에 고려 측의 진술이 들어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저고여(著古與)가 죽었던 것은 이웃 나라의 도적들이 저지른 일임을 폐하께서도 쉽사리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거쳐 온 행로로도 넉넉히 증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 >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12월 > 원수(元帥)가 말하기를, ‘도로가 매우 험난하니 그대 나라에서 왕래하기에는 분명 어려울 것이다. 매년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보내되 10인에 불과할 것이니, 그들이 올 때 공물을 보내도록 하라. 오는 길은 반드시 포선만노(浦鮮萬奴)의 땅을 지날 것이니 그대는 이것으로 증거를 삼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사신이 오는 것은 한결같이 약속한 것과 같아 매년 우리나라에서는 번번이 국신예물(國贐禮物)을 맡겨 황제께 진상하였습니다. 오직 갑신년(甲申年, 1224)에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포선만노의 영역을 지나지 않고 파속로(婆速路)를 따라 우리나라로 왔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사신을 접대하던 것에 의거하여 매우 신중하게 접대하였고, 또 국신도 보내었습니다. 그 뒤 사신이 왕래하는 것이 조금 뜸하기에 소국은 그 까닭을 적이 괴이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오래 뒤에 들으니 우가하(于加下)가 중간에서 길을 가로막고 상국(上國)의 사신을 살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후 우가하는 거짓으로 상국의 복장을 갖추고 우리의 북쪽 변경지역[北鄙]에 들어와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포선만노 또한 동쪽 변경지역의 2개 성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는데, 그들의 복색 또한 상국과 같았습니다. 이때 이후로 침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 >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9년(1232년) 11월 본래 고려와 몽골이 처음 형제의 맹약을 맺었을 때 몽골 사신은 반드시 포선만노의 동진/[[동하]]를 거쳐 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는데 저고여 일행들이 동하가 아닌 금나라의 파속로(婆速路)를 따라 고려로 왔다는 것이다. 당시 파속로 일대엔 금나라 원수 우가하(于加下)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즉, 저고여 일행이 안전하게 합의된 동하 땅이 아니라 위험한 금나라 파속로를 거쳐서 고려로 들어왔고 또 고려에서 몽골로 돌아갈 때에도 역시 동하 땅이 아닌 금나라 파속로를 거쳐서 갔으니 고려와는 전혀 무관한 파속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우가하 휘하의 금나라 군대들이 저지른 소행이란 게 고려 측의 진술이었다. 또한 일전에 몽골 사절단을 향해 화살을 쏘아 쫓아낸 것 역시 그 즈음에 금나라 잔당들과 동하 잔당들 즉, 여진족들이 [[몽골인]] 복장을 하고 북방을 노략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경고사격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1232년 11월에 보낸 국서를 계속해서 읽어보면 동하에서 몽골 사신에게 "고려는 그대 나라를 배신하였으니 삼가 가지 마십시오."라고 이간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 사신이 그 말을 듣지 않고 저고여 피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가던 길을 계속 가자 먼저 사람을 보내 고려인 복장을 하고 계곡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사신이 지나가자 활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금나라와 동하가 서로 짜고 고려와 몽골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게 고려 측의 주장이었다. 그 증인으로 포선만노의 부하로 있다가 도망쳐 온 왕호비(王好非)란 사람을 들었다. 당시 금나라는 몽골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른 상황이었다. 당시 금나라는 막장스런 외교 행보 덕분에 거의 주변국들 대부분이 적대관계였다. 우선 몽골 제국과는 정말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 이유는 [[칭기즈 칸]] 본인의 작은할아버지인 [[암바가이 칸]]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 제국이 성립된 그 이후부터 금나라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금나라로서는 칼끝을 다른 나라로 돌릴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의로 고려를 방문하고 온 사절단을 습격하여 고려인의 소행으로 위장하여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가도록 유도하고 국력 회복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이런 일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다만 금나라 입장에서 불행이라면 [[여몽전쟁/평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몽골은 처음부터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는 없었다. 단지 속국으로 두는 것에만 만족하고 금나라 멸망에 오히려 더욱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이 금나라 소행이라면 그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재나 역사책 같은데서는 보통 이 주장을 채택을 많이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